나홀로 북한산 등산-2 대동문(大東門)
나홀로 북한산 등산-2 대동문(大東門)
내가 북한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산세가 뛰어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우리의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드웨어보다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다. 산이라는 하드웨어에 역사는 영혼을 불어넣어 준다. 북한산은 그런 의미를 지닌 몇 안 되는 산이다. 산재한 45개의 사찰도 큰 역할을 하지만, 그 정점에는 단연 북한산성이 있다.
한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던,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의 5,000년 한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곳이다. 북한산성은 "다시는 병자호란과 같은 치욕을 겪지 않겠다"는 의지와 "서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조선 후기 국방 정책의 핵심 산물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고립되어 항복했던 기억은 조선 조정에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리하여 도성(한양) 바로 뒤에 강력한 요새가 있다면, 왕이 멀리 피난 가지 않고도 도성을 지키며 장기전을 펼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북한산성 축성은 선조와 효종 때도 논의되었으나, 막대한 비용과 인력 문제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국방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 강력하게 추진했다. 1711년(숙종 37년)에 시작하여 불과 6개월 만에 약 12.7km에 달하는 거대한 성곽을 완공했다.
오늘날 우리가 걷는 대동문이나 진달래능선 주변의 성곽길은 모두 이러한 역사적 절박함 속에서 만들어진 방어선인 셈이다. 이 성곽길을 걸으며 마음이 무거웠다. 어제, 4년 동안 45회의 항암치료를 견디며 그토록 삶에 대한 애착을 보였던 하동 친구의 부고를 접했기 때문이다.
대동문(大東門)
조선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함께 세워진 성문으로, 북한산성 동쪽 성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과 경기도 고양시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며, 과거 하남이나 광주 방면에서 들어오는 물자와 인력이 성 안으로 진입하는 주요 통로 역할을 했다.
하부는 홍예(무지개 모양) 형태로 돌을 쌓아 통로를 만들었고, 상부에는 군사들이 머물거나 지휘할 수 있는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다. 본래의 문루는 유실되었으나, 1993년에 고증을 거쳐 새로 복원했다.
인근에 군사 지휘소인 동장대(東將臺)가 있어, 대동문은 단순한 출입구를 넘어 방어 체계의 핵심 지점이기도 했다. 현재 문 앞쪽으로는 넓은 공터가 조성되어 있어,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식사를 즐기는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눈에 익은 풍경입니다.